로마서 8장 18-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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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로마서 8장 18-25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절)
→ 앞 구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17절) 것이다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유산)을 상속받는 것에는 그리스도의 고난도 함께 나누는 일도 포함한다.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그 영광을 위해 거쳐야 하는 통로이다.
→ 성도의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장래의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요 거기에 거할 성도의 영광이다. 성도의 고난은 신자가 장래에 누릴 영광을 약속한다.
→ 저울의 양쪽이 있다. 한쪽은 현재의 고난이 올려져 있다. 다른 쪽은 나타날 영광이 올려져 있다.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을 능가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현재의 고난(일시적이며 가벼움) ↔ 나타날 영광(영원하며 거대함)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참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딤후2:12)
→ 현재의 고난은 나타날 영광의 전주곡이다. 현재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지급하는 것은 아주 작지만, 장차 나타날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것은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다.
※ 고난받는 성도는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성도의 위로와 격려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서 발견한다.
※ 고난받는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십자가의 일치성”을 이룬다. 십자가의 고난은 성도를 이 세상에 동화하지 않게 한다. 십자가 고난이 없다면 성도도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중심성이 커질 것이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에게서 현세적 혜택만을 찾게 된다. 십자가의 고난은 성도를 위한 치료 약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절)
→ 장차 있을 영광은 인간만이 누리는 영광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도 동일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후 땅은 저주를 받았다. 타락한 인간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연에 큰 상처를 입혔(힌)다. 이런 이유에서 피조물도 인간 죄가 만들어낸 고통에 동참한다. 하지만 동시에 피조물은 타락한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신자만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도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고대한다).
→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듯이(기다리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요일3:2) 될 것이라는 표현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딸(자녀)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에게 붙은 자가 함께 온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하나님이 회복시키고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에 이른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절)
→ 피조물은 자기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 허무한 데 굴복한다. 피조물의 허무한 데 굴복함은 피조물이 쇠하여지고 부패됨을 말한다. 피조물은 늘 변하고 덧없고 신속하게 지나간다. 그러므로 피조물 자신에게 항구성을 찾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1).
→ 굴복하게 된 것은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는다. 즉, 땅을 저주하신 이는 하나님이다(창3:17). 피조물의 굴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하고 요동하는 피조물(물질 세계)에 우리의 마음을 두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마음을 들어올려야 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절)
→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어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소망한다. 이 말씀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지만, 피조물도 각각 자신의 본성에 따라 더 나은 온전한 상태로 변화될 것임을 말한다.
→ 천국에서 금속, 동물, 식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온전함을 가지게 될 것인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세밀한 접근은 지나친 사색이다. 피조물의 썩어짐의 종 노릇은 소멸을 뜻하는데, 소멸하지 않고 그 자체의 온전함으로 지속함이 피조물의 영광의 자유이다. 피조물의 온전함은 그 체질과 질서가 온전해져서 부패하고 소멸하는 특징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피조물이 어떠한 형태로 새하늘과 새땅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절)
→ 피조물은 한편에서는 그의 구원을 고대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며 “탄식하는” 사람과 같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해산을 앞두고 고통을 겪는 여인과 같다. 피조물은 아담의 타락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피조물은 종말론적 소망을 사모하여 탄식한다.
※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구원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구원은 사람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을 회복하는 우주적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는 탄식하는 피조물과 어떤 새로운 관계성을 가져야 하겠는가?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절)
→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미래의 영광이 지극히 큼은 이성 없는 피조물에게서도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에 그날이 오기를 탄식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으로 빛을 받은 우리 성도는 견고한 소망과 타오르는 열심으로 그러한 영광에 이르기를 더욱 고대하고 애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 “처음 익은 열매”는 장차 얻게 될 풍성한 수확을 보증한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믿는 자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이러한 열매는 장차 나타날 천국의 영광과 비교했을 때, 분량의 측면에서 극히 일부분이고 충만의 측면에서 아주 적다. 현세에서 성령이 주시는 열매들은 장차 참여하게 될 풍성함과 충만함을 보증한다. 현재는 천국의 첫 것을 조금 맛보지만, 장차 천국에서 마지막 것을 완전히 맛볼 것이다.
→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은 바로 성도의 탄식을 뜻한다. 성도의 탄식은 이중적 탄식이다. 하나는 현재의 죄 때문에 탄식한다. 그 안에 있는 죄의 통치는 사라졌지만, 죄의 질료는 남아 있기에 탄식한다. 성도는 죄가 완전히 없는 상태를 탄식한다. 다른 하나는 희망의 탄식이다. 복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서의 탄식이다. 마음을 들어올려 그들 현재의 모습이 아닌, 장래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온갖 비참한 것을 이기는 것이다.
→ 믿는 자는 이미 양자가 됐다. 하지만 양자가 받을 유업의 권리를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지, 그것을 완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양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영혼만 속량(구원)받는 게 아니라, 전인으로서 몸도 속량을 받는다. 몸의 부활로서의 부활의 영광이다. 현재 이 몸으로 죄를 짓지만, 몸의 속량을 받으면 몸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이 몸으로 죄를 짓는 것은 언제나 벗어버려야 할 것이다.
※ 탄식은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성도의 탄식은 그들 안에 있는 소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무엇으로 탄식하는가? 현재의 삶에서 거룩함으로 죄를 이기고자 하는 탄식이 있는가? 장차 올 영광을 너무나 사모하여 탄식하고 있는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절)
→ 구원은 현재적 사건으로 ‘이미’ 거기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아직 아니’인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성도는 미래에 올 것에 대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은 참 소망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인간 경험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소망의 대상이 아니다. 참 소망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관계하며 그것을 향한다. 진정한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것인데, 참음으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 신자의 소망이 보이는 것, 현재의 것에 집중된다면 신자에게 오는 고난과 환난은 더욱 그를 비참하게 할 것이다. 장차 있을 영광의 상태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신자의 현재적 삶에서 오는 고난과 환난은 완화되고 경감되어 그것을 더욱 수월하게 감당하고 그 속에서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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